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플라비우스 스틸리코 (문단 편집) === 군인으로서 === [[명장|전술가로서는 당대 최고]]라고 할 만하다. 테오도시우스 1세 재위기에는 딱히 그의 군사적 재능을 평가할 만한 기록이 없지만, 30대 초반에 군사령관이 될 정도면 이미 테오도시우스 1세가 직접 지휘한 전투에서도 두각을 드러냈을 가능성이 크다.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 [[알라리크]]와의 전투에서 그 역시 탁월한 장군이던 알라리크를 상대로 군의 기동과 매복, 야전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시종일관 우위를 점했던 것이나, [[라다가이수스]]를 제압할 때 보여준 정석적인 포위섬멸전을 보면 그의 전술가로서의 재능은 분명 뛰어났다고 할 수 있다. 이게 정말 테오도시우스에겐 큰 의미가 있는 재능이었던 것이, 왜냐하면 테오도시우스는 부대 관리, 병사 훈련, 보급, 군수 면에서는 정말 탁월한 재능을 자랑했고 전략안도 나쁘지 않았으나 전술적 능력은 정말 의외일 정도로 꽝이었기 때문이다. 삼국지 시대 동탁과 거의 군재 유형이 비슷했던 인물인데, 그럼에도 크게 성공을 거두었던 것은 스틸리코 같은 훌륭한 전술가가 테오도시우스의 이런 단점을 정확히 보완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테오도시우스가 괜히 딸이나 마찬가지인 조카를 시집보내 자기 편으로 확고히 굳힌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더군다나 알라리크와 이탈리아에서 맞겨룰 때나, 그 이후의 행적을 보면 스틸리코가 지휘한 병력은 양적인 면에서나 질적인 면에서나 상대에 비해 우위를 점한 적이 거의 없었다. 이탈리아를 침공하기 전에 알라리크는 [[일리리쿰]]군 사령관[*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다.''' 우리 편이냐, 적이냐의 흑백논리로는 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외교라는 것이 다 그렇지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때는 더더욱 그렇다. [[반농반목]]하는 부족집단의 부족장에게 최우선 목표는 자신과 부족원들의 생존·정착·번영이고, 오직 그것만을 위해 제국에 허리를 숙였다 폈다를 반복하는 것이며, 게르만 각 부족의 이런 양태는 서로마 말기, 부분적으로는 그 너머 6세기 초중반과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까지 계속된다. --근데 사실 이건 동롬이 나중에 어떻게 굴러갈지 뻔히 알면서도 동방 대신 그냥 서로마나 공격하라고 떠넘긴 느낌도 있다--]을 겸하며 [[테살로니키]]를 비롯한 동로마 제국~~???~~[* 마찬가지로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다!]의 주요 군사거점에서 충분한 보급을 받으며 정예군을 양성했고, [[라다가이수스]]는 그런 알라리크와 대등한 동맹자로 여겨졌던 세력가였다. 스틸리코가 그런 적들과 맞서면서 게르만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하고 노예까지 해방시켜가며 급조한 병력을 단기간에 전력화한 것은 물론, 그들의 충성까지 얻어낸 것은 보통 이상의 재능이 아니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전략가로서의 역량에는 여러 의견이 있다. [[북아프리카]] 반란을 진압할 때 불과 5,000명 병력으로 70,000 대군을 모았던 북아프리카의 길도를 제압하고[* 후대의 [[벨리사리우스]]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단기간에 북아프리카는 물론 이탈리아와 히스파니아를 안정시킨 전략은 분명 뛰어났지만, 이후 이탈리아 방위를 위해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등 속주를 지키던 병력들을 철수시킨 것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제국의 군사력이 심각하게 피폐해져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스틸리코가 피에솔레 언덕 전투 직전에 동원했던 병력이 겨우 30,000명인데 속주 군대를 차출하고 게르만족과 훈족을 용병으로 고용하며, 심지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래 최초라는 말까지 나온 노예해방이라는 극약처방까지 동원해 병력을 증강했음에도 30,000명에 불과했다면 정말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었는지도 모른다. ~~[[이탈리아 반도|본진]]이 털리게 생겼는데 [[속주|멀티]]가 무슨 상관~~ 그나마 이것도 스틸리코가 양호한 야전군(리미타네이)들 싹다 소환&닥치는대로 야만족 용병 데려오고 노예랑 검투사까지 강제징집해서 꾸역꾸역 모은 것이었다. 브리타니아 주둔군은 스틸리코가 미리 빼온 발레리아 빅트릭스 20군단 정도를 제외하면 나중에 찬탈자 콘스탄티누스를 지지해서 분리주의자로 갈아탔고 갈리아 주둔군 대부분은 방금 말한 반란군+몰려드는 야만족 막느라 이동불가능 상태였으며[* 그나마 꾸역꾸역 라인강에서 게르만족을 틀어막던것도 407년 이후로는 더 이상 막는게 불가능해진다. 소설 [[눈 속의 독수리]]가 위에서 나온 발레리아 빅트릭스 20군단을 주인공으로 삼아 이 당시 정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 정예였던 일리리아 주둔군은 내전 여러번 겪으면서 싹다 갈려나갔고 [[프리기두스 전투]] 이후에 서고트족이 일리리쿰에 눌러 앉는 바람에 재건도 제대로 못하는 상황이었다. 히스파니아와 아프리카는 후방이라서 그렇게 주둔군이 많지도 않았다. 따라서 저 중앙군 3만명이 당시 서로마 제국의 기동군단 전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전투력이 의외로 막강해서 알라리크의 정예 서고트족 군대도 간단히 제압해버리고 라다가아수트가 이끄는 10만 부족민도 싹다 몰살시켜 버린다. 서고트족과 4번 싸워서 4번 다 이기고 알라리크가 자기 처자마저 버리고 도주하게 만들었다는 점만 봐도 이 부대가 얼마나 강한지 잘 알 수 있다. 괜히 스틸리코가 서로마 최후의 명장들 중 하나로 손꼽히는게 아니다.] 어쨌든 그가 [[명장|유능한 군인]]이었다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별다른 이견이 없으며, 그가 어떤 야심을 품었건 간에 그 시점에서는 그만한 군사 지도자가 로마에 없었다는 평가 또한 마찬가지로 거의 이견이 없다. 게다가 스틸리코 이후 서로마의 희망들로 부상하는 콘스탄티우스 3세, 아이티우스의 아버지 가우덴티우스, 아이티우스 모두 다름아닌 이 스틸리코의 휘하에서 군 경력을 쌓으며 성장한 인물들이었다. 백여년 쯤 뒤 동양사에서, 본인 사후 독립하며 제각기 역사에 이름을 남긴 [[고환(남북조시대)|고환]], [[우문태]], [[후경]] 등을 한꺼번에 거느렸던 [[북위]]의 [[이주영(북위)|이주영]]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 사실 콘스탄티우스든 아이티우스든 본인들 부재시에 믿을만한 다른 장군이 없어 고생한만큼 스틸리코가 보다 오래 장수하여 커리어를 이어갔다면 서로마 제국이 부흥할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에서 아쉽다.[* 게르만족 왕국들의 군사적, 문화적 역량이 꽤나 성장하긴 하였으나, 이들조차도 로마 제국 기준에선 최악인 상태였던 아이티우스 시대 서로마군마저 여전히 1:1로는 이겨내지 못하고 갈려나갔다. 그러니 적어도 스틸리코까지 서유럽을 벌벌 떨게 한 로마군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은 상황이었다. 물론 아이티우스와 스틸리코의 군재가 보통 장군들을 훨씬 상회했던 것도 감안해야 하지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